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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덜룩한벽이나갖가지색깔의돌이박혀있는벽을가만히보면서산등성이와강, 벼랑, 나무, 구릉, 계곡과언덕이근사하게펼쳐지는그런풍경을떠올려본다. (이때) 담벼락이나얼룩이떠올려주는광경은마치종소리가울릴때와같다. 종소리에맞추어듣는사람의머릿속에어떤이름이나단어가연상되는것과똑같은일이일어나는것이다. 예술의영혼은(이런얼룩과도같은) 혼돈으로말미암아(비로소) 깨어나서새로운창안에이른다. - 레오나르도다빈치
 
얼룩덜룩한화면속에숨은그림찾기라도하듯점점이그려진사람들과, 추상회화를연상시킬만큼화면의대부분을차지하는비정형의얼룩탓에아득하게느껴지는존재감. 작가서윤희의그림이불러일으키는인상은이처럼비현실적이고비실제적인환영처럼다가온다. 현실과비현실의사이, 의식과무의식의경계위에있는듯한느낌. 마음의먼곳(心遠)으로부터길어올린듯한풍경, 추상과형상의경계를허물어유기적인덩어리를형성한풍경, 비정형의얼룩이심상이미지를불러일으키는풍경이다. 작가는이풍경을기억의흔적이나간격이라고부른다. 일관되게<기억의간격>을주제로하여이를심화하고다변화해온작가에게그리는행위는무엇보다도기억하는일이며, 기억을떠올리는행위인것이다. 이로써작가는기억을재생하고복원해낸비전을열어보이고, 기억이생성되고소거되는그역동적인현장속으로우리를이끈다. 
 
서윤희는먼저화면가득히비정형의얼룩을조성한연후에그위에모티브를그려나간다. 때론엷은담묵으로, 더러는짙은농묵으로얼룩들을화면에침윤시킨다. 그리고이렇게조성된얼룩이불러일으키는심상이미지에따라모티브가결정되기도하고, 얼룩가운데조성된빈화면에걸맞은모티브가선택되거나한다. 이런특성상우연성이보다적극적인계기로작용하게된다. 처음에우연성은말그대로예기치못한효과에의해생성되지만, 이후에는우연성을의식적으로사용하는단계로까지발전하게된다. 그러니까우연적인효과를사전에계획하고조율할수있게된것이다. 그렇다고우연적인효과로인해비정형의얼룩이정형화되거나상대적으로더결정적인이미지로굳어지는일은없다. 여전히우연성은우연성인것이며, 얼룩은얼룩인것이다. 그런데화면을가만히들여다보고있으면놀랍게도이비정형적이고비결정적인얼룩과얼룩이서로어우러져서장대하고심오한자연풍경이펼쳐지는것이다.

작가는이러한얼룩을위해안료를직접제작하는데, 보통의안료에다가홍차, 치자, 오미자등천연약재를혼합해만든수제안료를사용한다. 이때안료로사용된약재의종류와함량여하에따라서다양한색감과질감, 농담과번짐효과를연출할수있다.
이렇게조성된화면은비정형적이고비결정적인얼룩이두드러져보이며, 흡사오랫동안습기와햇빛에번갈아노출된나머지그피사체가희미해져서흔적만남은사진처럼낡고해져보인다. 색감과질감, 농담과번짐효과를연출하는것에서나아가시간마저조율할수있게된것이다. 이처럼얼룩과흔적과시간은상호내포적이고상호순환론적인개념이다. 비정형의얼룩이존재의흔적을불러일으키는가하면, 모든흔적은시간을내장하고있다. 그러니까흔적자체는현재의자장에속해있지만, 정작그것이불러일으키는존재는시간의저편에속해있는것이다. 이렇듯존재와부재와의모호한경계에대한인식이나부재로써존재를증명하는역설법은특히사진미학의핵심이랄수있는데, 이것이서윤희의그림에도고스란히투영돼있는것이다(실제로작가의그림은여러면에서사진고유의아우라를닮았다).
 
작가의그림은이렇듯얼룩과흔적에미세균열마저가세하면서고답적인느낌을자아낸다. 작가는이를위해염색한한지를뜨거운물에쪄내는과정을수차례반복하는데, 이일련의과정을거치면서지질의조직은더치밀해지고(질겨지고), 한지에스며든색감은더낡아보인다.
이러한얼룩이나흔적, 미세균열과낡은색감이어우러져주제인<기억의간격>을뒷받침한다. 기억의간격? 기억과기억사이에는공백이있다. 기억은결코원형그대로재생되지가않는다. 이를테면기억을재생하는과정중에현재의판단이나상상력이끼어들어기억을각색하거나왜곡하기도하고, 나쁜기억은억압해서망각속으로밀어넣기도한다. 나아가서로다른시간대나사건의층위에속한기억의조각들(파편화된기억)로써임의적이면서일관된허구적서사를재구성하기조차한다. 작가의주제는이런기억의불완전한복원력과함께기억의각색능력, 그리고이를지지하는기억의모호한속성을암시한다. 그림은이기억의속성을표상한것이다.
 
그리고작가의그림에는안료와함께천연약재가사용되고있지만, 정작그림에는안료의회화적효과에묻혀천연약재의특질이잘드러나보이지가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작가가천연약재를고집하는이유는단순히회화적효과를극대화하기위한보조안료로서의기능만이아니라, 치유와제의같은보다본질적인의미기능을부여하기때문이다. 이는실질적인의미로서보다는일종의상징적인제스처로이해할수있을것이다. 말하자면작가가떠올리는기억중에는좋은기억만있는것이아니라나쁜기억도있을터인데, 이를그림의표면위로불러내고되새김질하는(자신의상처와대면하는) 과정을통해서스스로를위로하고치유하는일종의주술적행위를감행하고있는것이다. 나아가그림의존재이유가보는이에게공감을불러일으키고마음을움직이게하는것(추체험을통해작가의경험을공유하는것)임을생각할때, 작가의주술행위는개인적인경험에서더나아가보편성을획득하게된다. 이처럼작가의그림은스스로를위로하고, 나아가타자를보듬는다.  
 
레오나르도다빈치는벽위의얼룩에서자연풍경을보고, 군상을보고, 전쟁을보고, 홍수를본다. 얼룩이그렇게보이는것은그형태의유사성때문이기도하지만, 화가의상상력에서기인하기도한다. 그리고비정형의얼룩이정형의이미지와동일시되는현상은어느정도는화가의인문학적배경에의존하지만, 기본적으론얼룩그자체의의미구조가열려있기때문이다. 이런열린구조탓에얼룩은무한한상상력의개입을허용한다. 얼룩이암시하는이미지는얼룩에내재돼있는것이기보다는사실은화가의상상력이불러낸것이다. 어쩌면보고싶은것, 기억하고싶은것, 즉주체의욕망이자신의무의식으로부터불러낸것인지도모른다. 그러므로얼룩은귀신과혼령, 신기루와데자뷰등상상력이만들어낸이미지와같은계열에속한다.
 
이로써서윤희의그림은심상풍경과열린풍경, 그리고무엇보다도일종의얼룩풍경(혹은질들뢰즈식으로주름풍경?)으로개념화할만한풍경의한지점을예시해준다. 작가의더듬이가찾아낸그풍경은자신의기억을재구성한것이지만, 얼룩의열린구조탓에누구든자신의기억이나무의식을대입해볼수있다. 따라서작가의그림이지만정작그의미는관람자의마음속에서결정되는풍경으로서, 그자체가저자의죽음(의미가완성되는지점이저자가아닌독자라고보는) 논의를강력하게뒷받침한다.
 
모르긴해도어떤얼룩이준령과, 또다른얼룩이계곡과대응되는것과관련해서작가자신조차도결정적인것은별로(혹은아무것도) 없을것이다. 볼때마다다르게보이고보는사람마다다르게보이는비결정적인풍경이흡사얼룩으로된퍼즐조각을꿰맞춰하나의이미지를재구성하고, 의미를추상해보도록종용하는것같다. 그리고그렇게재구성되고추상된풍경위에서우리는마음의먼곳(무의식?)과대면하고, 기억의희미한끝자락과만나게된다. 

고충환 /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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